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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詩史

악착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 경제학자 백선행..한국여성詩史<8>

남성보다 크게 살았던 여성들이 있었다. 큰 돈 벌어 세상을 위해 다 썼던 백선행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홍찬선 | 기사입력 2020/09/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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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이 쓰는 한국여성詩史<8> 평양과부 백선행

큰 돈은 하늘이 잠시 나에게 맡기는 것이다

악착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 경제학자

 

▲    백선행의 흔적 찾기에 나선 필자 홍찬선...수원 남문시장에 마련된 백선행 흉상 옆에서... © 운영자

 

큰돈은 하늘이 잠시 나에게 맡기는 것

내가 아껴서 잘 나서 벌어들인 게 아니다

허투루 쓰지 말고 그 분 뜻에 맞게 쓰는 이치

경제학 안 배웠어도 스스로 깨친 경제학자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 여의고

열여섯 살 때, 두해 함께 산 남편 먼 길 떠났다

스물여섯 살 때 어머니마저 귀천해 

고아가 된 청상과부 백선행

 

딸이라고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아버지를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쫓아낸 시집식구를

부모 제사 모시려고 양자로 들인 사촌오빠를

원망하지 않았다, 서러운 눈물을 꾹 참았다

 

▲  백선행 기념관   © 운영자

 

 

이를 악물었다 돈 모으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삯바느질 콩나물장사, 이십 리 밖 시장에서 

음식물 찌꺼기 모아다 돼지 기르기… 

악바리 과부라는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행은 또 닥쳤다

거간꾼 말 듣고 강동군 만달면의 만달(晩達)산을 샀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바위산을 시가보다 비싸게 주었다

불행이 마지막 시련이었다

사기(詐欺)가 사기(事機) 되었다*

 

만달산은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으로 덮여있었다

어느덧 환갑이었다 벌기만 하던 돈을 쓸 때였다

지갑을 열었다 동네에 커다란 돌다리를 놓았다

평양에 대한인을 위한 도서관과 회의장도 지었다

 

돈 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눈과 다리에 힘 빠진 걸 느끼자 어느덧 여든여섯

전 재산 35만 원은 모두 그의 손을 떠났다

조선총독부 표창장은 웃으며 거절했다

 

▲  백선행 기념비..     © 운영자

 

본디 내 것 아니었던 것

잠시 맡았던 물이 흐르고 흘러

넓고 넓은 평양들 옥토로 만들 듯

배달겨레 살리는 생전(生錢) 되었다 

 

잇따라 닥친 불행으로 흘린 눈물

바다 되어 코밑까지 차올랐지만

익사하지 않고 따듯하게 영원히 살았다

아웅다웅하던 핏대는 찬물에 뭐 줄 듯 사라졌다

 

 

* 사기(事機): 일을 해 나가는 기틀.

** 백선행(白善行, 1848~1933); 수원에서 백지용(白持鏞)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평양 중성(中城)으로 이사했다.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4세 때 안재욱과 결혼했는데 남편이 2년 만에 사망했다. 26세 때는 친정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안 한 일 없이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았다. 평양 근교인 강동군 만달면 승호(勝湖)리 일대의 만달산을 샀다. 황무지여서 거의 쓸모없는 땅을 속아서 비싸게 샀으니 백선행은 끝장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만달산은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이 많아 일본인 시멘트생산업자 소야전(小野田)에 팔아 평양 갑부가 되었다. 

 

환갑이던 1908년에 거금을 들여 대동군 용산면 객산리의 솔뫼다리를 돌다리(백선교, 白善橋)로 만들었다. 1919년 3.1대한독립만세운동을 겪은 뒤 1924년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밝혔다. 광성소학교에 1만4000여평, 숭현여학교에 2만6000여평을 기증하고(1925년), 미국선교사 모펫(Moffet)이 세운 창덕소학교에도 부동산을 내놓아 기백창덕보통학교로 발전시켰다(1927년). 연광정(練光亭)이 올려다 보이는 대동문가에 백선행기념관(대지 329평, 건평 324평)을 건설했다(1929년). 

 

그가 사회에 환원한 35만원은 현재 350억원 이상인 것으로 평가된다. 1932년에 기념관 앞에 백선행동상이 세워졌다. 조선총독부가 표창장을 주려고 하자 거절했다. 일제강점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1933년 5월, 백선행이 여든여섯 살로 서거했을 때 평양시민 3분의 2인 10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됐다. 1937년 1월1일자로 문예지 『백광(白光)』이 백선행을 기리기 위해 창간돼 6호까지 발행됐다. 

그의 고향인 수원의 남문시장에 <백선행의 흉상(胸像)>이 세워져 기념되고 있다. 눈에 잘 안 띄고 공중화장실 앞 공터에 소박하게 세워져 있어 많이 아쉽다. 물어물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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