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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詩史

바보 온달을 용장(勇將)으로 키운 평강공주<한국여성詩史>

여성은, 평범한 남성을 위대하게도 만든다. 한국 역사 속의 많은 여성이 그렇게 살아왔음을 우리가 안다

홍찬선 | 기사입력 2020/12/0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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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이 쓰는 한국여성詩史 <32>

바보 온달을 용장(勇將)으로 키운 평강공주

 울보는 온달에게 가려는 연극이었다

 

▲  TV드라마로, 영화로 여러 차례 영상매체로 국민들에게 사랑받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사진은 TV 드라마 ...평강공주는 어떤 작품에서나 또랑또랑하고 현명한 여성으로.....  © 운영자

 

단양 온달산성에는 온달이 가득하고

서울 아차산성에는 온달이 그윽하다

온달은 꽉 찬 보름달,

온달이 뜰 때마다 평강공주가 보인다

 

울보는 보기 싫은 녀석들 

떼어놓기 위한 눈가림이었다

진정으로 나라 사랑하고 

진심으로 백성 위하는 그 사람

키우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차츰 쎄지는 중국대륙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 힘 키워야 하는데

기득권 노래 부르는 권문세가 귀족들

새로 정권 잡은 철부지 권력자들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기 밥그릇 키우는 데만

눈 벌건 모습 두고 내버려 둘 순 없었다

 

▲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장군의 동상...서울 아차산 소재   © 운영자

 

노심초사하는 아버지, 

평원왕에게 깜깜한 밤에 봉화(烽火)를 올렸다

왕은 똑똑한 공주가 보낸 뜻을 알아차렸고

일가친척 패거리들 잇속 챙기느라 

눈알 시뻘겋던 놈들은 웬 봉환가 했다  

어린 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울보가 됐다

공주는 바보온달에게 시집가도록 판을 짰다

 

울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울보가 아니었다

울보는 눈과 힘과 지혜 갖춘 벤처사업가였다

울보는 바보에게서 자라고 있는 장군 싹을 보았다

울보는 옳다고 믿는 것을 추진하는 힘이 있었다

울보는 차근차근 하나씩 실행하도록 기획했다

울보는 온달과 시어머니를 끝까지 설득했다

울보는 앞서는 것과 뒤에 하는 것 깨달아

자기와 온달과 평원왕이 걸어야 할 길을 얻었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었다

운명은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운명은 약한 사람에겐 가혹하지만

운명은 길 얻은 사람에겐 순한 양이었다

바보는 장군이 되었고

울보는 대박을 터뜨렸다

▲ 전성기 시절의 김지미와 신영균(아래 사진)도,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영화 '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 운영자
▲     © 운영자

 

그러나 

대박이 끝은 아니었다

꽃은 피는 게 다가 아니듯

이쁜 꽃은 열흘 이어 피지 않듯

운명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하늘로 돌아가시자

시계바늘은 또 다시 요동쳤다

소백산은 험악했고 단양은 붉은 빛,

벤처는 상장하고 난 뒤 힘을 잃었다

 

더 이상 울보가 아닌 벤처사업가는

때가 되었을 때 떼를 쓰지 않았다

한(恨) 듬뿍 머금은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을 때

아내는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의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려운 때 힘듦 속에서 멋진 한 판

살았으니 뻗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십시다

 

▲   온달산성   © 운영자

 

때를 알아 온달 키우고

때를 알아 온달과 함께 멈추고

때를 알아 온달과 함께 돌아갔다

 

아차산성과 온달산성에는 평강공주의

넋인 듯 이름 모를 들꽃에 풀벌레들

한가위를 가득하게 수놓는다

서울 아차산성에는 온달이 그윽하고

단양 온달산성에는 온달이 가득하다

 

 

* 평강공주(?~?): 고구려 25대 왕인 평원왕(?~590)의 딸. 언제 태어나서 언제 사망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평강왕(평원왕)의 어린 딸이라고만 나온다. 평강공주라 하면 평강이 이름이지만, 평강은 아버지인 평원왕의 시호다. 결국 평강공주의 이름은 평강이 아니지만 평강공주로 굳어졌다. 

김부식이 온달을 바보로, 평강공주를 울보로 묘사한 것은 극적효과를 노린 ‘문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강력해져가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과정이었다. 5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평강왕이 온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공주가 왕명을 거스르고 고씨 대신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피운 사실이다. 셋째 공주가 궁을 나서면서 보물을 잔뜩 챙겨갔다는 사실이다. 왕이 정말 화가 났다면 공주를 내쫓을 때 보물을 갖고 가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온달이 대형(大兄)이라는 중요한 지위까지 올랐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온달의 최후와 관련된 사실이다.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한강 유역을 침탈한 신라를 정벌하겠다고 상주해 허락을 받았다. 출정하면서 온달은 “계립(鷄立)현과 죽령 이서 지역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아단(阿丹)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시신이 든 관이 움직이지 않자 공주가 가서 “죽음과 삶이 이미 결정됐으니 돌아가자”고 하자 관이 움직였다. 온달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신라와의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아군에 의해 피살됐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는 영양왕 즉위 초에 한강유역 회복이라는 평강왕의 숙원을 풀려고 할 정도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홍찬선, <평강공주는 왜 온달에게 시집 갔을까>, 『공감』, 2020. 5. 25일자.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QVeP7UDGJM000) 참조). 

 

▲   독자들에게 실감 있는 현장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항상 주인공과 관련된 현장을 찾아 취재하는   <한국여성詩史> 의 필자 홍찬선작가...온달산성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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