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나는 왜 65세에 오토바이를 시작했을까? <구자관 칼럼 30>

힘들게 사는 소년의 가슴에 맺힌 것이 어디 오토바이 뿐이랴? 그러나 가슴에 맺힌 그 응어리가 변해서....

구자관 | 기사입력 2022/01/13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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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관 대표책임사원 칼럼 (30) 오토바이

 나는 왜 65세에 오토바이를 시작했을까?

   그 소리 듣자, 딸은 미국에서 득달같이 

 

▲  65세 오토바이라면 늦깎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 늦깎이가 아니라....    © 운영자

 

 

나는 예순넷에 대학을 겨우 졸업했다

그리고 예순다섯에 오토바이를 시작했다

 

[yeowonnews.com=구자관] 젊은 사람도 오토바이를 타겠다 하면 부모가 말리고, 결혼한 청년이라면 당연히 그 아내가 말리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오토바이라는 것은 아예 위험물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이 탄다고 하면 아마 주변 여론이 그렇게 나쁘진 않겠지만, 60이 지난 나이에 오토바이를 탄다면, 긍정적으로 격려사라도 보내줄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오토바이에 대한 여론조사를 안 해 본 사람들도 하나 같이, 위험물로 취급하는 오토바이 타기.

 

게다가 나는 좀 ‘늦타기’다. 뭘 늦게 시작하면 ‘늦깎이’라고 그런다지만, 오토바이는 타는 거니까, ‘늦타기’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내가 여기서 늦깎이니 늦타기니 하고, 오토바이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좀 못마땅한 투로 언급하는 것은, 나 역시 60넘어서, 그러니까 늦타기 중에도 엄청 늦타기여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늦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남들이 20대에 하는 일을 30대 넘어 40대애 한다면 당연히 늦깎이나 늦타기 소리가 나온다. 오토바이와 나의 관계 역시 그런 사이다. 20대에 시작해야 적당할 오토바이 타기를 60 넘어 시작한다니까 당연히 칭찬보다는 만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지금도 많다.

 

진짜 나는 좀 늦다. 여러가지 면에서 늦다. 대학 졸업하는 나이는 23세나 24세. 남자가 대학 재학중에 군대 갔다 오면, 26세가 좀 넘어서 대학졸업장을 받는다.

 

그래도 26세라면 늦은 건 아니다. 내 경우는 64세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65세에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다. 내가 65세에 처음 오토바이를 탄다니까, 주변의 친지들이, 무슨 토픽 뉴스 대하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오토바이를 타려면 자동차 면허가 있어도, 또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오토바이 2종 면허를 새로 따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오토바이 연습을 시작했다고 할 때부터, 주변에서 걱정들을 하는 눈치였다. 말하자면, ”오! 그 위험한 걸 어쩌자고 그 나이에!!“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쳐다보는 거야 어떻게 쳐다보든, 쳐다보는 사람의 자유이지만, 무슨 못할 짓, 위험한 짓을 시작한 사람 보듯이 하는 시선 앞에서, 그러나 나는 위축되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도 했다.

 

▲  "아빠는 오래 사셔야 할 분이거든요..."  이것이 딸이 내 오토바이를 만류하는 이유여서....  © 운영자

 

         내가 오토바아를 타기 시작했다니까

            미국서 반대하러 달려나온 딸 

만약 그 때 아내와 한 집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보통 이상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을 수도 있다. 당시 아내는 딸과 함께 미국에 살고 있었던 덕분에 심한 마크는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가만히 있는데 딸이 나섰다.

 

당시 딸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업무가 많아 바쁘게 지낸다면서도, 내가 무슨 위험한 일을 하는 줄로 알았는지... 어느날 느닷없이 서울로 날아왔다. 딸은, 내가 오토바이 타는 거 말려야 한다는 사명을 가슴에 품고 미국서 날아온 것이다.

 

그 애가 나를 만나자마자 한 소리가 오토바이에 관한 건(件)이었다. ”아빠. 저는 아빠가 무슨 일을 하든 반대하거나 말리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건 아녜요. 오토바이는 안돼요. 아빠는 할 일이 많고 그래서 오래 사셔야 하니까요.“

 

아빠가 하는 일에 거의 반대라는 걸 하지 않던 딸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오래 사셔야 하니까요!“ 오토바이 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 애가, 아버지 오토바이 타는 거 말리려고 일부러 한국에 나온 것이, 자기 혼자만의 의사인지, 아니면 아내가 시켜서 그런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제 엄마가 시켜서 왔는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나 걱정은 시키지 말아야 되지 않겠는가? 아들이나 딸에게 걱정을 시키는 건 아버지가 할 일이 아니다. 그건 아버지의 본업(本業)이 아니다.

 

아니 사랑하는 딸에게, 걱정을 시킨다는 건 본업은 커녕 부업이어서도 안된다. 그리고 아빠의 오토바이에 대해 걱정되고 불안해서 달려 온 딸아이도 당연히 저 할 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위험한 오토바이 탄다는데 못본척 하는 딸이라면, 서운해 하지 않을 아버지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지금도 그래서 사람 중심 경영을...   © 운영자

 

        자전거 앞바뀌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짐을 싣고

         미아리에서 지금 영등포 타임스퀘어 자리까지 걸어서... 

나는 야간 고등학교 출신이다. 또래들이 공부하는 낮에는, 나는 공장에 다녔다. 지금 영등포 타임스퀘어 자리에 들어선 공장이 내가 일하던 공장이 있던 자리다. 거기가 원래는 경남방직 자리였다.

 

방적기계에서 실을 뽑다 보면 엉키는 경우가 많다. 실이 엉키면, 지금은 그냥 폐기처분해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당시에는 버리지 않았다. 엉킨 것을 풀거나, 또는 못 푼 것은 그대로 재활용하는 데다 팔 수도 있었다.

 

엉킨 실은 걸레 만드는 데에 사용된다. 지금은 걸레도 원사로 만들어 쓰지만 그 당시는 그 엉킨 실을 가지고 걸레를 만들어 팔았다. 이른 아침 4시에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어 문래동까지 가야 하는, 좀 힘든 코스.

 

미아리 고개가 워낙 가파로와서 전차도 미아리 고개를 못 넘어가고 돈암동을 종점으로 하고 있었다. 새벽 4시에 미아리에서 문래동을 향해 출발하면 아침 9시경에 도착한다. 당시 한강에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던 시절. 다리를 건너면 노량진이다. 거기서 다시 문래동까지 가려면 영등포를 지나서 가야 한다. 그렇게 힘든 코스를 통해 도착하면 아침 9시다.

 

가다가 고개길이 있으면 밀고 끌고,... 그것도 힘들지만, 짐을 싣고 돌아올 때와 비교하면, 갈 때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올 때는 짐을 싣고 와야 한다. 짐은 실뭉치였다. 자전거 뒤에 실뭉치를 잔뜩 실으면 앞 바퀴가 들릴 지경. 그런 상황에서 다시 출발하여 반대 코스로 해서 미아리 공장까지.....그것이 매일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아주 중요한 일과였다.

 

갔다가 미아리까지 되돌아 오는 길.. 아침밥도 제대로 못먹은 상태였다. 그럴 때 길에서 사서 먹는 호떡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호떡을 하나 사먹고 오던 길을 되돌아 온다. 한여름엔 더울대로 더워서 온몸이 땀범벅... 있는 힘을 다해서 언덕에 올라가면 냉차 장수가 있다.

 

잊을 수 없는 그 보리냉차의 시원한 맛이라니!!! 그때는 설탕이 아니고 사카린을 보리차에 타서 준다. 당원을 탄 물에 얼음 한덩어리가 떠있다. 그걸 마시고 땀은 시키는둥 마는둥 또 출발한다.

 

그 짐을 싣고 공장에 도착하면 오후 4시다. 도착했어도 쉴 수가 없다. 그 길로 바로 가방 들고 학교로 가야 한다. 힘들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 바로 그 때 옆으로 홱 하고 지나가던 그 오토바이.

 

”저거다. 오토바이. 저거 이 다음에 돈 벌면 나도 하나 사서 이 짐을 실어 나르면 되겠다. 짐이야 있건 말건, 언젠가 내가 오토바이 꼭 타고 말 것이다. 그런 날이 오고 말 것이다 “

 

▲  오토바이가 부러웠던, 그 토록 힘든 계절, 지금의 삼구는 그 힘든 계절을 지나.....   © 운영자

 

    그 힘들던 소년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토바이였다면.... 

아버지는 그래서 오토바이를 탄다.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거든! 물론 그렇다고 꼭 오토바이를 타는 건 아니겠지만, 그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알아달라는 뜻이 아니라, 너의 아버지가, 그 힘들던 소년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꿈 가운데 하나인 오토바이

 

 ”그래서 아버지는 이제 오토바이를 타려고 한다.“.

 

내 소년시절의 문래동과 미아리 고개와 자전거와, 또 땀 흘리던 내 옆을 쌔앵하고 지나가던 오토바이와 보리차 얘기를 듣던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 흘낏 물기가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빠의 어려웠던 시절이, 지금도 슬픈 딸의 눈물....

 

”아빠 알겠어요. 그렇지만 조심해서 타세요.“

 

학원에서 1주일 교육을 받고 시험을 쳤다.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고 같이 시험 치른 사람들이 엄살 같은 소리를 하는데, 나는 한 번에 합격했다, 그 길로 바로 3천만원짜리 할리 데이비슨을!!

 

더위와 갈증에 힘든 미아리고개를 오르던 내 곁을 쌔앵하고 지나가던 오토바이. 그 아픈 추억으로 만들어진 오토바이를, 그래서 나는 65세에 타기 시작해서, 지금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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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22/01/15 [10:53] 수정 삭제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박진우 22/01/16 [13:16] 수정 삭제  
  꿈은 이루어진다. 맞습니다. 정직과 성실로 이루어진 꿈, 더욱 보람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YOUNG BEAR 22/01/17 [21:53] 수정 삭제  
  감동입니다. 저는 어릴적 과자 사먹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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