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책임사원 구자관 칼럼<36> ‘늦깎이 1’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이는 환갑이었다
이 나이에 학교 다니는 행복은 아무리 설명을 잘 해도...
|
행이냐 불행이냐를 따질 동안에는...
[yeowonnews.com=구자관] 인생의 행복 가운데 ’나이에 맞게 사는 행복‘이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이에 맞지 않게 사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논리를 강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나이에 맞지 않게 산다는 것은 결국 불행? 글쎄 어떤 경우에도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행이냐 불행이냐를 따질 수 있다면, 거기까지는 그래도 ’완전 절망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환갑 나이에 대학에 가는 사람을 세상은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별로 언급할 것이 없다. 언급할 것이 있다 해서, 이미 시작한 일을 중단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다만 이 나이에 학교 다니는 행복은 아무리 설명을 잘 해도, 듣는 사람들이 잘 모르리라고 확신한다.
지금 자기가 서있는 시점(時點)이 행이냐 불행이냐를 따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불행하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진짜 불행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사실 행이냐 불행이냐를 가늠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갑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다면, 물론 ‘특수한 경우’라는 의견에 나도 동조할 수밖에 없지만, 가고 싶은 대학에, 환갑이 지나도 못가는 경우보다야 백배는 좋은 환경이라고 말 할 수 있다.
|
환경? 그렇다, 환경이다!
사실 나에게는 ‘환경’이라고 들이댈만한 아이템이 얼마든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환갑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거나, 반대로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 할 수는 없겠다.
이 나이에 대학 들어간다고 해서 월급이 오르거나, 어디 좋은 직장에서 스카우트를 오거나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물론 이 확신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할 필요가 있느냐?“는 대답 못할 질문을 곁들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고 젊은 세대들과 어울리는 것이, 잃어버린 것, 즉 떠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의 회복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얄궂은 의문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겠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겪었던 6.25 전쟁.. 그 전쟁 속에서 배울 것을 못 배우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험한 세월을 보냈던 것은, 물론 나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친구들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슈우샨 보이가 되어
어머님은 1남 4녀 집안의 장녀였다. 막내 이모가 20살에 결혼해서. 외가집에서 잔치가 벌어진 1943년에 엄마 남매들이 다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여성들은 적령기를 놓치면, 재취로 가는 경우도 있어서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자매가 모두 임신을 했다. 1944년에 이모들이 해산을 했는데 모두가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해 6월에는 내가 태어났다.
6.25가 터졌을 때, 작은 아버지 한 분이 동대문 경찰서 총경이었다. 또 외삼촌은 인민군들에게 총살당했을 만큼의 우익 인사였다. 그런 이유가 없었더라도 어려운 전쟁통에, 우리 가족이 겪은 어려움은 더욱 컸다.
1953년에는 나를 비롯해서 집안의 또래들이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모두 중학교에 가는데 나만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중학교는커녕 인생의 막바지 같은 현실에 시달려야만 했다. 슈우샨 보이가 되어 다른 사람 구두도 닦았고, 아이스케익 통을 메고 다니는 등 행상이라도 해서 적은 돈이나마 벌어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4명의 이종사촌들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곁에서 나는 슈우샨보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 구두를 닦으러 다녀야 하는 입장. 어린 나이에, 자꾸 이종사촌들과 비교하지는 않았으면서도, 솔직히 말해 사촌들이 부럽기도 했다.
|
자기 돈 써가며 우리를 가르치는 교통순경=교장선생님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로지 돈을 목표로, 앞뒤 안가리고, 체면도 안가리고, 인정사정도 가리지 않고 돈버는 일에만 악착 같은 사람도 있다. 6.25 이후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인간상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으리라고 한다.
그런 와중에 정식 학교는 아니었지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접하게 된다. 나처럼 구두 닦으러 다니는 슈우샨보이나 행상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현직 교통경찰관이었다. 그는 나처럼 학교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아이들. 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쳤다. 교통경찰이다 하면 생기는 것이 많아서, 교통경찰 2년만 하면 집 한채를 살만큼 수입이 좋다는 그 시대에, 천막학교를 만든 그 교통경찰은,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 봐야 돈이 생길리 없는 ‘교장선생님’이 되어 열을 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교통경찰관은, 우리 같은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교통경찰로 돈 버는 것이 훨씬 쉽고 수입 좋은 일일텐데, 자기 돈 써가며 우리들 가르치느라고 여념이 없어 보였다.
무슨 돈으로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교통경찰관이 천막학교를 만들었다. 학교라야 사과상자 위에 책을 놓고 공부하는 천막학교, 적령기에 학교 못 다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공부시켜 주는 곳이었다. 구두닦이통이나 아이스케키통을 메고 가서 공부하는 곳이었다. 대학생들이 와서 자원봉사로 가르치기도 했다.
|
아들 하나만 잘 키우면 만사 형통?
그 천막학교는 교통경찰관이 교장선생님이었다. 다른 교통경찰관들은, 삥땅을 잘 해서 2년만 하면 집을 산다는데, 천막학교를 만든 그 교통경찰은, 자기 돈으로 천막, 책상, 헌 책등을 사다가 아이들에게 배부해 주고 공부를 가르쳤다. 그가 그 천막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다. 그 교장선생님은 가끔 학교에 와서, 우리들을 격려도 해주는 등 꽤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런 교장선생님 덕분에 환경이 열악한 그 천막학교에서 공부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3년을 천막학교와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학교 공부만큼 되지는 못했다.
공부에 대한 한이 맺혀, 기회만 있으면 뭘 배우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내 평생의 습관, 또는 행동지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해도 누가 뒤를 돌보아 주지 않으면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집에서는 7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거기에 공부까지 시킨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벅차서, 그러니까 교육비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서, 큰 아들만 키우자 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아들 하나만 잘 키우면 나머지 다 따라서 먹고 살 수 있다고 보신 아버지는 제일 큰 형님만 대학에 다니게 한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 당시의 교육한경은, 초등학교 교실에 100여명의 학생이 들어가 공부를 해야 할만큼 열악했다. 그런 와중에 큰형님이 한양대학교 토목과에 합격했다. 큰형님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나는 중학교도 가지 못할만큼, 당시의 가정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 후 나는 계속 일하고 공부하면서 강문고등학교 야간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졸업도 물론 강문고등학교에서 했지만, 대학은 꿈도 못 꿀 형편이긴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가긴 가야 하는데 무슨 돈으로 가랴, 싶어서 말도 꺼내지 못한채 넘어간 것은 당시 우리집 형편으로는 물어볼 것도 없는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결국 대학 못간 다른 또래 아이들이 선택하듯이, 나도 군대 입대를 선택했다. 중학교는 고등공민학교에 다녔고, 엉성하게 고등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게 된 셈이다.
|
아내가 내 진짜 학력 알았으면 결혼이??
나의 이런 실력에 비하면 아내는 주산 5급. 부기 1급의 실력자였다. 나는 아내와 결혼할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대학을 안 다니고도 나온 척 했다. 물론 아내와 결혼하기 위한 일종의 신분위장이었지만, 아마도 아내가 그 당시 내 진짜 학력을 알았으면 결혼이 안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학력만 거짓말 한 것이 아니라, 집안도 좋은 집안으로 거짓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의 아니게 학력을 부풀리기도 했다. 그 시대엔 괜한 일에도 자꾸 학력을 따지니까...말하자면 학력 위장은 일종의 신변보호를 위한 정당방위라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리라 본다.
고등학교만 다녔으면서도 대학을 나왔다고 아내에게 거짓말 한 것이 항상 미안했다. 그래서 결국 아내에게 고백을 했다. 아내에게 거짓말 한 거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공부 열심히 하기로 맹세도 했다.
강문고등학교 졸업할 때, 졸업 사진을 찍기 위해서 교복을 처음 입었다.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다 대학에 갔다.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집안에서도 그렇다. 5형제 중 나만 대학에 못 가게 되었다. 지금도 그것이 한이 된다. 그 한이 너무 깊게 맺혀져서 결국 환갑 나이에 대학에 다니기로 결심했으니..... 아내에게 거짓말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라도, 꼭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깊어졌으나.....
--------------------------------------------------------------------------------
(편집자 註..대표책임사원 구자관회장의 ‘늦깎이’ 는 다음 주에 ‘늦깎이 2’로 이어집니다)
|
|||
|
|||
![]()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