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대표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43) 엄마에겐 언제나 할 얘기가 많다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하다. 대표책임사원도 어머니그리움에 눈물을....

구자관 | 기사입력 2022/04/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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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43)   

 

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하셨지만, 다 알고 계셨다

 

부지깽이 가지고 공부하신 어머니

 

▲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은 어머니....어머니 생각은 지워지지도 않는다는 구자관 대표책임사원 © 운영자

 

지금도 사무치게 부르고 싶은 이름....어머니

[yeowonnews.com=구자관어머니는 기대고 싶은 언덕이다내 나이가 70이 넘었어도지금도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언제 불러도 질리지 않는 그리운 이름어머니에게는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시다특히 우리나라 같은 전통사회에서 살아오신 어머니는더구나 할 말이 가슴에 쌓여항상 가슴이 무거우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다자식으로서 내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듯이어머니도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나셨다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한 말이 가슴에 쌓이면그것이 바로 한()이 된다

 

1남 4, 5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학교에 발도 못들여 놓으셨다그런데 어머니의 남동생인 외삼촌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셨다어머니를 학교에도 안보내셨던 외할아버지는 열일곱살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시집 보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시집 오시기 전에아주 간절히 공부를 하고 싶으셨다고 한다외할아버지는아들인 외삼촌은 학교에 보내면서도 어머니는 딸이라고 제쳐놓으셨다고 한다그 시대의 딸들은 다 그렇게 공부에서 제쳐졌다.

 

어머니는 외삼촌이 공부하는 옆에서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 등너머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외삼촌이 그마저도 싫어했다고 한다남존여비시대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안남녀 차별의 현장 같은 외가였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외삼촌 등너머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매일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부지깽이로 글자를 써가며 공부했다외삼촌 등 너머로 공부한 것을 예습하고 복습하셨다부지깽이로 글씨를 배운 엄마부지깽이로 예습 복습을 하며 한글을 깨우치고 다른 공부도 했던 엄마말하자면 엄마는 그 시대 각가지 차별대우를 받던 이 나라 여성의 전형적인 상징이셨다나이 들어 군대에 복무하고 있을 때 엄마의 정성스런 편지는 항상 기다려지는 소식이었다편지를 참 다정다감하게 써보내 주시던 우리 엄마.

 

엄마는 애를 열이나 낳으셨다하나는 유산되고둘은 낳아서 죽고우리 7남매를 키우셨다아들은 형님과 나그리고 남동생 둘그 중에 형님은 대학(한양대학교 토목과)까지 다녔다.    

 

▲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직원을, 삼구는 '여사님'이라 부르고 있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는, 최고의 호칭일지 모를만큼, 높여 부르는 명칭인데....  © 운영자

 

  중풍 맞고 쓰러지신 어머니는..

나는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면서 자랐다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6 25 전쟁 이후 우리 국민들은 수제비를 많이 먹고 살았다미국에서 보내준 구호미가 대부분 밀이었다. 그 시대 우리 국민 가운데 수제비 안 먹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밀가루 반죽한 것을 끓는 물에 떼어 넣고호박이나 멸치 등을 넣고 끓인 수제비가전쟁 통에 주식(主食)이 되기도 했다밀가루 반죽한 것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 넣고호박을 썰어넣고...간장으로 간을 맞추고.,,빨간 수제비도 있었다빨간 밀로 반죽한 수제비였다.

 

 어머니는 항상 국물만 드시고 건더기는 나를 주셨다하루 온종일 일하다가 들어오면어머니는 항상 국물만 드시고 나는 건더기만 먹게 해주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어려운 살림을 해가시는 것도 힘든데 쉰한살 되시던 해에 풍을 맞고 쓰러지셨다고혈압에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셨다어머니가 그렇게 쓰러지신 것은 나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자가 풍을 맞으면 대개 오른쪽을 못 쓰고남자가 풍을 맞으면 왼쪽을 못쓰게 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데어머니는 왼쪽을 못 쓰시게 되었다풍을 맞은 후엔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에게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소의 양을 사다가 매일 드시게 했다행상을 하시면서매일 그 날 번 돈으로 어머니를 위한 간식을 사들고 오셨다그러나 아버지가 드시라고 사오신 음식을 어머니는 혼자 드시는 법이 없었다당신은 안 드시고 슬하의 4남매에게 먹게 하셨다

 

▲   매출이 1조가 훨씬 넘는 중견기업 삼구Inc의 회장인 필자는, 스스로를 낮춰 '책임대표사원'이라 는 이름으로 불리욱기를  더 소망할만큼 겸손한 경영인으로서.... © 운영자

 

거의 동갑내기였던 어머니와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하셨다소 내장인 수구레나 양이나  간천엽 등을 사다가 직접 조리를 하셨다간천엽 등 내장은 영양분이 많지만조리하는 데 손이 많이 간다양을 칼로 잘 으깨서 끓여가지고 어머니가 드시게 했다소의 내장은 잘 으깨서 끓이면 하얀 우유 같은 즙이 나온다

 

어머니는 씹지를 못하시니 그렇게 으깬 것울 끓여서뽀얀 국물이 나오면 어머니께 드시게 했다아버지는 일 끝내고 들어올 때마다엄마가 잡수실 것을 꼭 사가지고 들어오셨다아버지는 생신이 12월이고어머니는 1월이셨는데거의 동갑내기지만 아버지가 우선이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내가 아버지 하시듯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마음만 앞을 서고 안타깝기만 했다수제비라도 하면어머니는 건더기는 나를 주고 국물만 드셨다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원인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불효자라는 심힌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

 

60년대 초라면이 나오기 시작했다닭고기 맛 나는 라면이 인기였다연로(年老하신 분들은 고기를 잡숴야 하는데 마음만 앞을 섰고당시 고급 음식점 가운데 하나였던 거구장의 샤브샤브를 한 번 대접해야 하는데 한동안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돈을 조금씩 모아서어머니를 거구장에 모시고 가서 샤브샤브를 대접했다그런데 어머니는 드시지 않았다왜 안드시냐고 몇 번 여쭸더니 어머니 대답이 맛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안다나를 멕이려고 물만 드신 그 마음을.....

 

▲   이미 2008년에 삼구IMC 는 사원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지고 열의FMF 다하는 ....책임경영 체제를 선포하면서, 앞선 기업이 되어... 벌써 13년전 얘기다    © 운영자 

 

        첩결혼은 허용하지만도박은 허용할 수 없다는 시대. 

어머니에게  거구장 샤브샤브를 대접하려고 벼르고 있을 때였다내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라면을 끓여 주셨다그 편치 않으신 와중에도 내게 기울이는 어머니의 정성은 비할 데가 없었다그런데도 나는 고기 한 칼 못 사다드렸으니... 나는 아무 것도 엄마를 위해서 한 일이 없다.

 

어머니가 주신 말씀 가운데 지금도 잊지 못할 말씀이 있다.  

첩을 얻는 것은 용서가 된다그러나 노름은 절대로 안된다.”

그러고 보니 외삼촌도 첩이 있었다.  '김ㅇㅎ' 라는 여성...당시 인간문화재로 불리우던이름깨나 날리던 여성...권번 출신이었다고 한다

 

외삼촌이 아이 일곱을 낳고 ... 첩과 결혼하는데 외숙모가 하객으로 첨석한다고 했다남편이 첩과 결혼식 올리는데 본부인이 아이들 데리고 참석한다는 것이었다그런 결혼식을 첩결혼이라고도 했다남편이 첩결혼을 하는데본부인이 아이들 데리고 축하하러 가는 시대그런 어림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 왔다.  

 

첩살림또는 첩결혼(본부인이 있는데 첩과 결혼식 올리는)이 횡행하던 시대그 시대는 남자가아내 아닌 여자를 얻는 것이 허용되던 시대였는데 노름은 안된다는 시대이기도 했다 

 

아버지도 노름을 하셨다어머니만 모르고 계신 듯 했다그당시 본부인들은남편의 첩결혼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노름은 절대로 참지 말라는 시대였다첩결혼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집은 날아가지 않는다그런데 노름은 잘못하면 집이 날아간다그 정도가 아니라더 잘못하면본부인까지 노름빚에 팔려간다는 .....

 

그러니까 본부인 입장에선남편이 첩을 얻으면 첩이 남편 사업 위해 애를 써줄 수도 있겠지만노름 하는 사람은 항상 상대를 저주하게 되니노름 하면 다 망한다는 것이 어머님 말씀이기도 했다

 

▲   아내 있는 남자가 '첩결혼 '은 용서받던 시대....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화투를....사진은 이 기사 속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 운영자

 

         밥주발에 밥 아닌 화투가 들어있는 것을 보신 아버지

아버지는 양반집 아들이었다자식들에게 욕도 안 하는 분이었다그런데 그 아버지가 노름에 손을 대셨다아버지가 노름을 하시는데 밤새 노름방에 가서 돈 없으면 땅문서는 물론이고 마누라도 판다는 ...

 

할아버지가 원을 살아서 덩그런 집 한채는 있을 때였다첩을 얻으면 집은 안 날라가겠지만노름을 하면 집 날라가는 건 순간적인 일이라는 시대... 그런데 노름 시작한 아버지엄마는 노름 하지 말라는 소리도 못하고 계셨다칠거지악 같은 엉터리 윤리로 여성을 옭매이던 시대니까.....밤새도록 노름을 한 아버지는그래도 아침식사는 꼭 집에 들어와서 하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밤 새워 노름을 하고 들어와도아무말 없이 일단 진지상 차려 드리는 어머니칠첩반상에 반짝이는 놋그릇그날도 밤새 노름을 하고 이튿날 들어오신 아버지어머니가 무거운 칠첩반상에  차린 아침상을 아버지 앞에 갖다 놓으셨다.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셨다아버지가 수저를 들고 주발뚜껑을 여시니그 밥그릇에 밥 아닌 화투가 들어 있는 것 아닌가아버지는 밥상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 치셨다내 나이  4살 때였던가그 후 아버지는 노름을 딱 끊으셨다어머니는 힌 마디 말씀도 안 하시고아버지를 노름에서 손을 떼게 하신 것이다

 

노름 문제에 대해서 그 전에나 후에나어머니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다내가 일을 하다가 늦게 귀가하면 항상 대문 앞에 서서 기다리시는 어머니는 ”아버님 주무신다 .“ 그러니 조용하라는 말슴이었고아들딸들이 아버지를 어렵게 대하도록 하는 교육이었다그러니까 나는 귀가하면툇마루에서 방으로소리 안나게 조심조심 걸어들어가야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심조심 여기까지 살아왔다살아오면서여지껏 술에 취해 주정을 하거나 실수한 적이 없다아버님 덕분인지 어머님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물으면 "어머님아버님 덕분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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