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43)
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하셨지만, 다 알고 계셨다
부지깽이 가지고 공부하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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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무치게 부르고 싶은 이름....어머니
[yeowonnews.com=구자관] 어머니는 기대고 싶은 언덕이다. 내 나이가 70이 넘었어도, 지금도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 언제 불러도 질리지 않는 그리운 이름. 어머니에게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시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전통사회에서 살아오신 어머니는, 더구나 할 말이 가슴에 쌓여, 항상 가슴이 무거우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다. 자식으로서 내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듯이, 어머니도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한 말이 가슴에 쌓이면, 그것이 바로 한(恨)이 된다.
1남 4녀, 5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학교에 발도 못들여 놓으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남동생인 외삼촌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셨다. 어머니를 학교에도 안보내셨던 외할아버지는 열일곱살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시집 보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시집 오시기 전에, 아주 간절히 공부를 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아들인 외삼촌은 학교에 보내면서도 어머니는 딸이라고 제쳐놓으셨다고 한다. 그 시대의 딸들은 다 그렇게 공부에서 제쳐졌다.
어머니는 외삼촌이 공부하는 옆에서, 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 등너머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외삼촌이 그마저도 싫어했다고 한다. 남존여비시대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안. 남녀 차별의 현장 같은 외가였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외삼촌 등너머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매일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부지깽이로 글자를 써가며 공부했다. 외삼촌 등 너머로 공부한 것을 예습하고 복습하셨다. 부지깽이로 글씨를 배운 엄마. 부지깽이로 예습 복습을 하며 한글을 깨우치고 다른 공부도 했던 엄마. 말하자면 엄마는 그 시대 각가지 차별대우를 받던 이 나라 여성의 전형적인 상징이셨다. 나이 들어 군대에 복무하고 있을 때 엄마의 정성스런 편지는 항상 기다려지는 소식이었다. 편지를 참 다정다감하게 써보내 주시던 우리 엄마.
엄마는 애를 열이나 낳으셨다. 하나는 유산되고, 둘은 낳아서 죽고. 우리 7남매를 키우셨다. 아들은 형님과 나, 그리고 남동생 둘. 그 중에 형님은 대학(한양대학교 토목과)까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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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 맞고 쓰러지신 어머니는..
나는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면서 자랐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6 25 전쟁 이후 우리 국민들은 수제비를 많이 먹고 살았다.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미가 대부분 밀이었다. 그 시대 우리 국민 가운데 수제비 안 먹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밀가루 반죽한 것을 끓는 물에 떼어 넣고, 호박이나 멸치 등을 넣고 끓인 수제비가, 전쟁 통에 주식(主食)이 되기도 했다. 밀가루 반죽한 것을 적당한 크기로 떼어 넣고, 호박을 썰어넣고...간장으로 간을 맞추고.,,빨간 수제비도 있었다, 빨간 밀로 반죽한 수제비였다.
어머니는 항상 국물만 드시고 건더기는 나를 주셨다. 하루 온종일 일하다가 들어오면, 어머니는 항상 국물만 드시고 나는 건더기만 먹게 해주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어려운 살림을 해가시는 것도 힘든데 쉰한살 되시던 해에 풍을 맞고 쓰러지셨다. 고혈압에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쓰러지신 것은 나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자가 풍을 맞으면 대개 오른쪽을 못 쓰고, 남자가 풍을 맞으면 왼쪽을 못쓰게 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데, 어머니는 왼쪽을 못 쓰시게 되었다. 풍을 맞은 후엔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에게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 소의 양을 사다가 매일 드시게 했다. 행상을 하시면서, 매일 그 날 번 돈으로 어머니를 위한 간식을 사들고 오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드시라고 사오신 음식을 어머니는 혼자 드시는 법이 없었다. 당신은 안 드시고 슬하의 4남매에게 먹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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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동갑내기였던 어머니와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하셨다. 소 내장인 수구레나 양이나 간천엽 등을 사다가 직접 조리를 하셨다. 간천엽 등 내장은 영양분이 많지만, 조리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양을 칼로 잘 으깨서 끓여가지고 어머니가 드시게 했다. 소의 내장은 잘 으깨서 끓이면 하얀 우유 같은 즙이 나온다.
어머니는 씹지를 못하시니 그렇게 으깬 것울 끓여서, 뽀얀 국물이 나오면 어머니께 드시게 했다. 아버지는 일 끝내고 들어올 때마다, 엄마가 잡수실 것을 꼭 사가지고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생신이 12월이고, 어머니는 1월이셨는데, 거의 동갑내기지만 아버지가 우선이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아버지 하시듯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마음만 앞을 서고 안타깝기만 했다. 수제비라도 하면, 어머니는 건더기는 나를 주고 국물만 드셨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원인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불효자“라는 심힌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
60년대 초, 라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닭고기 맛 나는 라면이 인기였다. 연로(年老) 하신 분들은 고기를 잡숴야 하는데 마음만 앞을 섰고, 당시 고급 음식점 가운데 하나였던 거구장의 샤브샤브를 한 번 대접해야 하는데 한동안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돈을 조금씩 모아서, 어머니를 거구장에 모시고 가서 샤브샤브를 대접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드시지 않았다. 왜 안드시냐고 몇 번 여쭸더니 어머니 대답이 ”맛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를 멕이려고 물만 드신 그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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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결혼은 허용하지만, 도박은 허용할 수 없다는 시대.
어머니에게 거구장 샤브샤브를 대접하려고 벼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라면을 끓여 주셨다. 그 편치 않으신 와중에도 내게 기울이는 어머니의 정성은 비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고기 한 칼 못 사다드렸으니... 나는 아무 것도 엄마를 위해서 한 일이 없다.
어머니가 주신 말씀 가운데 지금도 잊지 못할 말씀이 있다.
“첩을 얻는 것은 용서가 된다. 그러나 노름은 절대로 안된다.”
그러고 보니 외삼촌도 첩이 있었다. '김ㅇㅎ' 라는 여성...당시 인간문화재로 불리우던, 이름깨나 날리던 여성...권번 출신이었다고 한다.
외삼촌이 아이 일곱을 낳고 ... 첩과 결혼하는데 외숙모가 하객으로 첨석한다고 했다. 남편이 첩과 결혼식 올리는데 본부인이 아이들 데리고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결혼식을 ‘첩결혼’이라고도 했다. 남편이 첩결혼을 하는데, 본부인이 아이들 데리고 축하하러 가는 시대. 그런 어림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 왔다.
첩살림. 또는 첩결혼(본부인이 있는데 첩과 결혼식 올리는)이 횡행하던 시대. 그 시대는 남자가, 아내 아닌 여자를 얻는 것이 허용되던 시대였는데 노름은 안된다는 시대이기도 했다 .
아버지도 노름을 하셨다. 어머니만 모르고 계신 듯 했다. 그당시 본부인들은, 남편의 첩결혼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노름은 절대로 참지 말라는 시대였다. 첩결혼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집은 날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노름은 잘못하면 집이 날아간다. 그 정도가 아니라, 더 잘못하면, 본부인까지 노름빚에 팔려간다는 .....
그러니까 본부인 입장에선, 남편이 첩을 얻으면 첩이 남편 사업 위해 애를 써줄 수도 있겠지만, 노름 하는 사람은 항상 상대를 저주하게 되니, 노름 하면 다 망한다는 것이 어머님 말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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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주발에 밥 아닌 화투가 들어있는 것을 보신 아버지
아버지는 양반집 아들이었다. 자식들에게 욕도 안 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노름에 손을 대셨다. 아버지가 노름을 하시는데 밤새 노름방에 가서 돈 없으면 땅문서는 물론이고 마누라도 판다는 ...
할아버지가 원을 살아서 덩그런 집 한채는 있을 때였다. 첩을 얻으면 집은 안 날라가겠지만, 노름을 하면 집 날라가는 건 순간적인 일이라는 시대... 그런데 노름 시작한 아버지. 엄마는 노름 하지 말라는 소리도 못하고 계셨다. 칠거지악 같은 엉터리 윤리로 여성을 옭매이던 시대니까.....밤새도록 노름을 한 아버지는, 그래도 아침식사는 꼭 집에 들어와서 하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밤 새워 노름을 하고 들어와도, 아무말 없이 일단 진지상 차려 드리는 어머니. 칠첩반상에 반짝이는 놋그릇. 그날도 밤새 노름을 하고 이튿날 들어오신 아버지. 어머니가 무거운 칠첩반상에 차린 아침상을 아버지 앞에 갖다 놓으셨다.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셨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고 주발뚜껑을 여시니, 그 밥그릇에 밥 아닌 화투가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밥상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 치셨다. 내 나이 4살 때였던가? 그 후 아버지는 노름을 딱 끊으셨다. 어머니는 힌 마디 말씀도 안 하시고, 아버지를 노름에서 손을 떼게 하신 것이다.
노름 문제에 대해서 그 전에나 후에나, 어머니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다. 내가 일을 하다가 늦게 귀가하면 항상 대문 앞에 서서 기다리시는 어머니는 ”아버님 주무신다 .“ 그러니 조용하라는 말슴이었고, 아들딸들이 아버지를 어렵게 대하도록 하는 교육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귀가하면, 툇마루에서 방으로, 소리 안나게 조심조심 걸어들어가야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심조심 여기까지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여지껏 술에 취해 주정을 하거나 실수한 적이 없다. 아버님 덕분인지 어머님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물으면 "어머님아버님 덕분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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