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51 (눈물)
남자는 평생 세 번만 크게 울어야 한다지만...
나는 한국 사람 가운데서도 눈물 많이 흘린....
|
사친회비 안 냈다고 졸업장 안 주던 그 졸업식장에서
[yeowonews.com=구자관] “울지 마라. 더구나 남자가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리면 안된다.”
어느 라디오 연속극에선가 들었을법한 대사(臺詞)다. 그런데 내가 직접 들었다. 여러번 들었다. 10살 되기 전에 6.25전쟁을 겪은 한국남자 치고 이런 소리 몇 번 안 들어 본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전쟁은 그렇게 눈물 많이 흘리는 사람들을 양산(量産)한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눈물 많이 흘린 한국사람’ 속에 포함된다. 그만큼 내 인생은, 특히 초반부에 눈물로 질척거린 삶이었다. 나이 들어 생각하면, 남자의 눈물이라면 역시 <박정희의 눈물>이다. 그가 우는 사진, 훌쩍거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콧물을 닦는 사진을 보며, 주먹 불끈 쥔 한국 남자도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눈물은 그렇게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
물론 내 인생이 흘린 눈물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눈물과는 구별이 되지만, 사나이의 눈물에는 그만큼 애절함이 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주먹으로 쓱 문지르는 남자의 눈물은, 보는 사람의 눈에는 드라마틱하게도 보이겠지만, 그 눈물을 흘리는 당사자의 가슴은 오죽했을까?
물론 어려서 흘리는 눈물은 <사나이의 눈물> 에 안 끼워줄지 모르지만, 그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그런대로 참기 힘든 인생사연을 지닌 사람임에 틀림 없다.
나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살았다. 눈물 많은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눈물을 흘리는 그 시간에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나이는 평생에 세 번 운다는 눈물 철학은 누가 발명한 작품인지 몰라도, 눈물 공부를 제대로 못한 사람이 한 말 같기도 하다. .
생각해 보면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울었다. 특히 어렸을 때 흘린 눈물은 또래들에 비해 몇 배는 많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 때 내 눈물은 양(量)도 많았지만, 질(質)로 따져도 순도(純度)가 높은 눈물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때도 많이 울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새나라의 새일꾼이 되겠습니다”
이 졸업식 노래를 들으며, 다른 애들은 안 울었지만 나는 많이 울었다. 사친회비 못냈다고 졸업장을 주지 않아서, 졸업장 못받은 졸업식이 서러워서였는지...어린 나이에 참으로 견딜 수 없어 흘린 눈물이다.
|
참을 수 없어 울던, 나의 눈물 젖은 소년시절
그리고 그보다 먼저, 1958년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은회를 했는데 사은회비 안 냈다고, 나는 사은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사은회라야 사과나 사탕, 사이다, 삶은 계란 등을 놓고 하는 조촐한 모임이였지만, 사은회에 못 들어오게 해서, 사은회 하는 교실 유리창 밖에서, 사은회장을 창밖에서 들여다 보며, 그 때 내가 참 많이 울었다. 몇 끼를 굶어서 배가 엄청 고플 때도 안 울었는데... 사은회장에서 소외된 눈물....참을 수 없었던 나의 눈물 젖은 소년시절.
어머니는 5남매였다. 어머니가 장녀. 외삼촌이 그 다음. 그리고 다음으로 이모가 셋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5남매의 맏딸이었다. 엄마가 다섯번째 낳은 아이가 바로 나였다. 1944년, 해방되기 전해였다.
1943년에 우리 막내 이모가 시집 가고, 우리 엄마를 비롯해 5자매가 다 출산했는데 모두기 아들이었다. 그렇게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시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초등학교 졸업식까지는 다 같이 했는데, 사촌 네명은 다 중학교에 갔고, 나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슈우샨보이 박스를 메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 때 많이 울었다. 교복 입은 사촌들과, 구두닦이 통을 메고 마주치던 날이 있었는데, 그런 날에도 나는 많이 울었다. 그러니까 가난은 항상 눈물을 동반했다. 가난은 한과 슬픔과 눈물을 함께 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눈물로 질척거린다.
|
지금도 잊지 못할 세 번의 뜨거운 눈물은....
슈우샨 보이를 하다가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때는 공장에 다닌다면 ‘깜장탈을 쓴다’ 고 했다.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고 공업용 기름을 만지다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매지니까, 깜장탈을 썼다고 한 것이다.
공장엔 다니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안 다닐 수는 없었다. 야간학교일망정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공장에선 내가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 가기 위해 공장에서 나올때, 주인이 “야 어디 가?”하고 부르기 일쑤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내가 야간학교 가니까, 그러니까, 공장 주인이 학교 가지 말라는데 가니까 미워서, 내가 학교 가려고 나설 때 꼭 나를 부르고, 학교 간다고 그러면, 욕을 하면서 “야 너 내일부터 그만 둬! 나오지 마!!”.... 그러니까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에 내가 굴하지 않고, 이튿날에도 공장에 나갔고, 일 하다가 책가방 들고 학교로 가곤 했다. 그것이, 야간학교나마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동갑내기 사촌들과 한 동네에서 함께 컸다. 해방도 함께 맞았다. 죽느냐 사느냐 6.25도 함께 겪었다. 그래도 사촌들과 함께 다 무사히 겪어나갔다. 키를 재보며 함께 자랐다. 같은 나이라 중학교도 함께 가야 하는데 나만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자연스레 가슴에 못이 박혔다. 열세살 그 나이에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렸다. 밤이면 엄마 못듣게 소리 없이 흐느끼며 베갯잇을 꽤 여러장 적셔놓기도 했다.
그동안 꽤 많은 눈물을 흘렸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내 인생 동안, 세 번의 눈물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고,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눈물 잊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이 내 예감이다.
첫 번째는, 아이들에게 고기를 사주었는데, 아이들은 더 먹고 싶다고 했지만, 고기를 더 사주지 못해 흘린 눈물. 아이들은 불광동에 살고 나는 신당동 살 때였다. 아이들을 불광동에 데려다주고, 나는 신당동집으로 어두운 밤중에 걸어오면서, 밤중이라 남의 눈 꺼릴 것도 없이, 참 많이 울었다.
두번째는 시각장애인 학교에 가서, 그 학생들 앞에서 뭐라고 인사말을 해야 하는데, 목이 메어 말을 못하고 그냥 마이크를 잡고서 끼억끼억 울던 때의 그 눈물도 참으로 아픈 눈물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창립 30주년 되던 날, 거래처 사장님들 앞에서 인사말을 해야 하는데, 그분들과 악수할 때의, 그 분들의 거친 손...그 거친 손의 감각을 지울 수 없어,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 대신 울어버린 눈물.
참 많이 울며 살았다. 남자의 눈물이다 하면, 박정희 전대통령의 눈물이 생각난다. 그 눈물은 개인적인 눈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나 민족울 위해 흘린 눈물이었다고 생각한다.
|
|||||||||||||||
|
|||||||||||||||
![]() |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