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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없었다면 DJ가 대통령 되었을까? [여원뉴스 희망 연재]

이 나라 여성 인권의 암흑기에, 남여평등운동을 하던 이희호와 '아내를 사랑하라'의 여원이 같은 길을...

김석주기자 | 기사입력 2019/07/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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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뉴스 희망 연재:

이희호 없었다면 DJ가 대통령 되었을까? (1) 

 

▲ 이희호는 DJ 만난지 12년만에 결혼하지만, 신랑감이 부족하다고 망설이거나 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 운영자

 

                   준비된 페미니스트 동업자 이희호를 회상함

이희호여사는  이 나라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 리더였다. 이희호의 페미니즘과 여원의 <아내 사랑>은 맥을 같이 한다. 우리나라 여성 인권의 암흑기에, 남녀평등의 기치를 내 건 이희호여사와 여원은 그 시대 여성인권 역사의 양극이기도 했다.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이희호, 남녀평등을 위한  가족법 개정에 앞장 섰던 실천적 페미니스트 이희호....이에 여원은 <페미니즘 동업자> 이희호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  이희호의 인생은 DJ를 만나자마자 IMF 가 돼버리고 만다. 그래도 이희호는 IMF 를 물리치지 않고...  © 운영자

 

                  '현모양처' 네글자를 지면에서 몰아낸 여원의 페미니즘        

 한국의 아내들이 가진 세계적인 장점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살림솜씨다. 남편의 수입이 아무리 적어도 살아낸다. 안살림은 아내 몫이라는 전통적인 사고가 우리나라 여성의 피 속에 오랫동안 흐르고 있었다.

 일제 36년과 6.25를 거치면서 이 전통적인 사고는 더욱 실천적이 되었다. 6.25로부터 먹고 살기가 조금씩은 낳아지기 시작하던 70년대 중반까지의 살림을 해결해 나간 것은, 밖에서 수입을 벌어들이는 남자가 아니라 안에서 살림을 맡은 아내들이었다. 

 아무리 돈을 조금 벌어다 주어도 살림을 해냈다. 그래서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들로부터 ‘엄마는 마술사’ 라는 경이에 가득찬 소리를 들었다. 

 한국 여성의 세계적인 장점 두 번째는 ‘참아주는 것’이다. 어려운 살람살이도 잘 참아 나갔지만, 특히 남편에 대해서 참는 것은, 아니 참아주는 것은 거의 인력(人力)을 초월한다.

  남성중심사회여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여성들은 그런 일을 따지지도 않고, 억울해 하지도 않고, 엄살하지도 않고, 들어내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냈다.

 남편이 때로 아내 아닌 여자를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일이 있어도, 심지어는 그 여자를 집으로 데려 오는 일(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이 있어도, 그것은 남자 소관의 일이라고 참아 주었다. 

 외국 같앴으면, 또는 요즘 같앴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을 그 시대 여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여성의 미덕으로 되어 있던 시절의 우화라고나 여겨두자.

그런 여성을 현모양처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 당시 여원은 ‘현모양처’ 네 글자를 여원 지면에서 추방했다. 그 용어를 절대로 쓰지 않기로 한, 한국 저널리즘 최초의 페미니즘 운동이기도 했다

 

 

             DJ와 이희호는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빛과 그 근원   

 DJ의 인생에 있어서 이희호는 도저히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DJ와 이희호의 관계는 ‘빛과 그림자’와의 관계를 넘어선다.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빛과 그 빛의 근원’이라 해야 옳다.

 빛이 DJ라면 그림자가 이희호가 되는 것이 한국적 해석이다. 허지만 굳이 이희호가 빛의 근원이어야 하는 이유는 DJ의 인생에 있어서 이희호는, 그림자라고 부르기에는 그 비중이 너무 커서 그렇다. 

 DJ에게 이희호가 빛의 근원까지 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DJ가 겪은 그 큰 불행의 고비고비마다 이희호는 DJ보다 더 큰 고통을 감수했다는 것 외에도, 그 고통을 나누고 견디고 또 대처할 방법을 찾아 충고하는 데에서도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DJ의 인생에 있어서 이희호가 항상 아주 적절한 충고를 하고, 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이희호는 단 한 번도 방관자 노릇을 못 해보고 평생을 보냈다.

 

      DJ를 만남으로 해서 완전히 IMF가 돼버렸던 이희호의 인생

 사람 하나 잘 만나면 지옥에서 천당으로 가기는 어렵지 않다. 반대로 사람 하나 잘못 만나면 멀쩡하게 천당에서 유유자적하던 사람이 지옥에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DJ의 경우는 물론 전자에 속한다. 그야 말로 DJ는 자기 인생에 이희호를 끌어들임으로 해서 크게 성공한 케이스다.

 반대로 이희호의 인생은 DJ를 만남으로 해서 아예 IMF 가 되고 만다. 

  그가  겪어 왔던 그 많은 고통의 벼랑길에서 이희호가 없었다면 DJ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을 것임은 물론, 김대중대통령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도 있고, DJ 스스로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고 있으며, 측근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특히 DJ는 여성문제와 국제정치 문제에 있어서 이희호에게 많은 충고를 받아 왔다. DJ의 페미니즘은 거의 이희호의 페미니즘의 파생이었다.

 DJ가 속한 정당의 여성정책이 다른 당과 차별화 되고, 여성중심의 페미니즘이 실감 있게 평가되는 데에는 이희호의 전문적인 충고가 힘이 되었다. 

 

▲ 이희호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 꽃밭에서 살듯 밝고 행복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인생의  대부분은....한 남자의 인생을 보듬어, 한 시대의 지도자로 만드는 어려운 고난의 ...     © 운영자

 

 37년간 국회에서 폐기되던 그 법률안이 이 나라 여성의 인권을

 1951년 피난 수도 부산에서 처음 이희호를 만났을 때 DJ는 아직 정치에 입문하기 전의 사업가였지만,  워낙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희호 역시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을만큼 공부에 열중하는 여성이었다. 그들은 독서 서클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결혼한 것이 1962년이니까 만난지 11년만의 결혼이다. 그동안 이희호는 미국 유학도 다녀오고 당시는  YWCA의 총무로서 여성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여류가 되어 있었다. 

 결혼 얘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지만, DJ의 여성정책에 이희호의 충고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1952년에 이희호가 여류변호사 이태영 등과 함께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이는데,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이 법안은 52년에 국회에 처음 상정된 이래 89년 통과되기까지 무려 37년을, 매년 상정되고 폐기 되기를 되풀이 한다.    

 이 가족법 개정안의 통과에는 당시 국회의원이던 DJ가 앞장 선다. 

 “약한 사람의 편이시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서 보호 받아야 하고 힘을 보태주어야 할 약한 사람은 여성입니다.”

 이희호의 간절하고 강력한 충고가 먹혀들어간 것이다. 페미니즘이란 용어가 한국에 수입되기 이전에, 이희호는 이미 페미니스트였으니까. 

 이희호 등이 앞장 서서 개정하려 했던 이 법률안은, 남성 위주의 국회에서 37년이나 계속 표류하다가 결국 DJ의 주동으로   통과를 보게 된 것이다. 

 

▲ 2 살 연하의 남자, 결혼을 한 번 했던, 아이가 둘이나 있는 홀아비..그래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만난지 12년만에 결혼으로...(사진은 DJ와 이희호의 결혼식)    © 운영자

 

               심지어 교도소에서도 이희호에게 충고를 구했던 DJ

 이희호는 DJ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이었고, 동지였고, 후원자였고 킹메이커였다. 

 그녀는 언제나 DJ에게 보낼 충고나 협조를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DJ는 교도소 내에서도 이희호에게 의견을 물었고 충고를 구했고, 그에 대한 이희호의 조언을 존중했다.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할 땐  DJ가 부르고 이희호가 받아 쓰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국제문제나 여성문제에 있어서 이희호의 조언이나 협조는 절대적이었고 이 부분에 관한 한 이희호는 자신 있는 협조를 할 수 있었다. 

 이희호는 결혼 전 이화여전 졸업 후, 미국 램버스 대학과 스캐릿대학의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대한여자청년단의 외교국장, 이대 사회학과 강사, YWCA 연합회 총무, 범태평양 동아시아 여성연합 한국지회 부회장 등의 사회활동과 폭 넓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그 분야의 훌륭한 자질을  쌓고 있었다. 이미 페미니즘의 실천자였고, 한국 페미니즘의 초기부터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의 정치생활을 크게 도와 줄 수 있는 자질과 훈련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계속)

 

****이 기사는, 이희호 관련 저서 '이희호의 메이 아이 헬프 유?" 를 바탕으로, 그 책의 저자인 김재원(여원뉴스 수석칼럼니스트)과의 협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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