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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일..영화처럼 파란만장한 삶에서 1인다역 계속중

한지일..한 시대의 운명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영화배우..한 시대의 증인이기도 하다

김석주기자 | 기사입력 2019/12/0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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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뉴스 인터뷰/돌아온 한지일]

 

한지일..영화처럼 파란만장한 삶에서 1인다역 계속중

"해외망명설, 김대중 관련설 이젠 말 할 수 있다"

바텐터, 주차도우미, 식당보이 등 수십개 직업에 종사

 

 

▲ 한지일은 유명한 셰프의 조수로 들어가, 열심히 일을 하고 요리도 배우고...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한지일의 특징이고 장기다     © 운영자


[yeowonnews.com=김석주기자]  그가 돌아왔다. 한지일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그가 그동안 연예인으로선 쉽지 않은 다양한 직업으로부터 연예계로 컴백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있지만, 본인 말로는 "그건 아니다" 로 들어주어야 한다. 또 한지일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 두 번째 돌아왔다는 미국에서 돌아온 것을 말한다. 또한 그가 첫 번째 두 번째 돌아왔다에는 얽힌 사연도 있다. 심지어 해외망명에서 돌아왔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 그가 미국으로 떠난 원인 가운데, DJ(김대중 전대통령) 댁과의 30여년 인연도 곁들여 있다. 그 얘긴 나중에 다시 하겠지만, 이번에 한지일이 돌아왔다는 그의 첫 번째 직업적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한지일의 첫 번째 직업은 모델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다시 모델로 돌아온 것이다. 원래 잘 나가던 모델이었다가, 영화감독에 의해 거리 스카우트 되어 배우로 나섰던 한지일. 아마 현역모델로서의 일도 하겠지만, 우리나라 모델계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늘 시니어모델이나 어린이 모델을 위한 일에 올인할 것으로 보인다. 프레스센터 19층 프레스클럽에서 만난 그는, 한 시절을 누비던 영화배우 그대로의 멋과 야성을 들어내고 있었는데.....

 

--지난 1026일 오후에 부산예술회관에서 한지일씨가 주연한 영화 미희시사회가 있었다고 들었다. “원로 영화배우 한지일이 26년만에, 주연을 맡은 단편영화 '미희'가 관객들과 만난다.”는 기사도 떴다. 어떤 영화인가?

그 영화 '미희'는 주인공 진덕(한지일 분)의 밝지 않은 노후를 통해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고령화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조명한 단편영화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고, 나도 시사회에 참석했는데, 감회가 깊었다. 한국영화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만든 특별 변사영화.

--며칠 전엔 한국모델협회의 '시니어모델선발대회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고 들었다.

700여명 응시자 중 본선에 오른 후보 30여명을 심사했다.좋은 신인 모델들이 더러 눈에 띄였다.

--앞으로 다시 모델 생활을 할 것인가?

나는 원래 모델이었고, 지금도 섭외가 들어오곤 하지만,... 개인의 모델 일보다는, 모델 업계 발전과 정화에 할 일이 있으리라 싶다. 최근 어린이 청소년모델시니어모델 선발 대회 등이 난립하는 편이고, 시니어모델들의 문제도, 같은 동업자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싶다.

--시니어모델들은 패션쇼에도 나가고 화보도 찍는 등 활동이 왕성해졌다고는 하지만, 수입을 챙기기 보다는 재능기부 쪽으로 흐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앞으로 .그런 일에도 참여하게 될 것인가?

그렇다. 어린이모델이나 시니어모델들의 권익보호도 현재 대두된 문제 가운데 하나다.

 

▲ 원래 한지일은 잘 나가는 모델이었다. 사진은 지난 11월초 시니어모델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한지일 (오른쪽에서 두번째. 그의 왼쪽이 모델협회 4대회장이었던 도신우, 그의 오른 쪽이 대한모델협회 현재 회장 임주완, 그  오른 쪽이 현역 시니어 모델 김칠두     © 운영자

 

 

--지금 하고 있는 일, 노동 같은 일도 여러가지여서 바쁘다고 들었는데...

나도 생활인이니까 직업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201710월에 귀국했는데, 아무래도 수입이 있어야 해서..,나는 지인도 많고, 그들의 경조사나 초청 모임 등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사람도 많이 만나고 하니까 자연 소비가 많다. 그러니까 직업이 있어야 한다. 최근엔 직장생활도 한다. 호텔에서 3개 직책을 맡아 6개월 계약했는데, 8개월 일했다. 웨이터, 도어맨, 주차요원 등도...

--그런 일.....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힘들지 않은가?

그런 건 초월했다. 직업에 귀천 없다. 미국서도 그랬다. 수십가지 일을 했다. 지금도 일거리만 있으면 내 능력껏 한다.

 

▲ 1999년 12월 19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이희호여사가 동교동 집을 나서는 모습...두 분의 뒤로 한지일과 김흥업의 모습이 보인다     © 운영자


한지일은 73년말 소리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가족이 미국에 있었다. 미국에서 수 많은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 바텐더, 주차 도우미, 식당 보이 등...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했다. 천성적인 부지런함과 의지가 수십가지 직업을 버텨내게 했다. 5년만인 78년에 돌아온 한지일...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해서, 78년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인 1979년엔 아시아영화제 남우상을 연달아 거머쥔다. 1985년에는 이름을 한지일로 바꾼다. ‘길소뜸에 함께 출연했던 김지미의 ''자와 신성일의 ''자를 따서 바꾼 이름, 한지일이 된 것. 그리고 89년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미국에서 고생깨나 했다고 들었다 직업도 여러 가지 전전하고....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모두 내가 선택하고, 나를 위해 하는 일이었으니까. 모두 27개 직업을 체험하게 됐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 남보다 많이 하고 또 잘 하려고 애쓴다. 인정도 받고 싶고 열심히 많이 하는 편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철학이 대단해 보인다.

일은 생활문제다.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남보다 잘하려고 한다. 지역마다 다니며 봉사를 많이 했다. 지금도 50년째 봉사 다니고 있다.

--그런데 자살하려 했다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70년대 초에 약 먹고 자살했다. 죽었다가 깨어났다. 영화도 할 수 없고.., 절망감에빠져서... 외할머니가 발견하고 병원 가서 살아났다.

--두번째 미국가게 된 얘기 좀 듣고 싶다. 떠도는 소문처럼 망명이라도 한 것인가?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다. 73년에 미국에 갔다가, 78년에 돌아왔다. 영화 일도 별로 없었고....귀국했지만 엄청 고생했다. 그때 MBC 라디오가 실존인물 연속극을 시리즈로 내보낼 때다. 정주영회장, 이병철회장, 김우중회장 등 대단한 분들의 스토리가 나가는데, 거기 대종상을 탄 한지일의 성공 스토리가 고백이란 제목으로 방송됐다. 양인자가 극본 쓴 작품으로 청취율도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안기부가 검열하던 시절이었다.

 

▲ 지금도 영화계 행사에 참석하여 레드카펫을 밟는 한지일의 멄진 모습     © 운영자


한지일은 수사기관의 감시받는 몸이 됐다. 김홍업과 경희대 입학 동기였던 관계로 친분이 두터웠다. 김홍업은 경영학과, 한지일은 신문방송학과였는데 1학년때부터 친하게 됐다. 쫓겨다니는 홍업의 친구로, 더구나 보라매공원 등 DJ의 정치집회에 참석하면 카메라가 인기 배우 한지일의 얼굴을 잡는 통에, 한지일은 DJ 정치집회 단골 참가자로 찍혔고, 게다가 한 때 한지일은 동교동 집에 가서 살기도 했으니....이래저래 홍업을 중간에 놓고 DJ댁과 한지일의 인연은 30년 관계가 되었다. 때로는 홍업을 잡으러 수사기관원들이 새벽에 한지일의 집을 덥쳐 들쑤셔 놀고 가는 일도 있었다. 이래저래 탄압이 말이 아니었다. 작품이 안 들어오기 시작했고....그래서 견디다 못해 83년에 또 미국으로 간다. 그래도 한지일과 홍업의 오랜 우정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김홍업씨와 오랜 친구 관계이고 DJ의 동교동 댁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니, 정치를 했다면 그 많은 고생 덜 할 수도 있었을텐데....

배우는 배우다. 배우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물론 내가 원했다면 정치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보지 않았다.

--한국에서 여러가지 직업에 종사하고 고생도 했다지만, 배우로서는 성공한 편이라고 본다. 또 비디오 제작자로서, 한때 사업이 성공도 했지 않은가? 87젖소부인 바람났네등을 제작하여 초창기 인터넷 시대에 .대박도 터뜨렸다. 그 때 빌딩도 마련했었다는데....

힘들게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우에게 출연 제의는 끊어지고 ...그 당시 내가 출연한 영화는 거의 다 탄압을 받았다. 그러니 누가 내게 일을 줄 것인가? 제작을 하려고 해도 한지일과 사업하면 정보부가 친다는 소문 때문에.....비디오 제작 사업은 제작비가 영화에 비해 아주 저렴하게 들어가니까...힌 때 돈도 벌었지만...83년 말에 견디다 못해 또 미국, 베트남 등에 나가 일을 했다.

 

▲ 일거리가 주어지면,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힘 든거 가리지 않고 아주 열심히 하는 한지일..사진은 대형 마트에서 일 할 때의 한지일     © 운영자

 

 

--그 당시 대박난 비디오 중에 젖소부인 바람났네시리즈 등 에로물이 더러 있었다고 들었다.

기관이 노리고 있으니 에로물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사회 문제를 다루면 정보기관에서 나를 그냥 두었겠는가? 

--그 당시 탄압받던 얘기를 아는 사람이 영화계에 많은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신성일선배가 작고하기 전에 들려준 얘긴데, 신선배가 영화배우협회장을 지내던 시절, 기관으로부터 도대체 한정환(한지일씨의 본명)이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전화가 자주 결려왔고, 신성일선배가 이를 막아내는데 곤욕을 치루곤 했다고 들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고생하는 동안에도 가끔 한지일씨가 출연했던 영화를 TV주말극장 같은데서 방송해 주곤 했다.

가끔 내가 출연했던 영화 얘기를 듣는다. ‘백치 아다다’, ‘아제아제바라아제등을 케이블에서 보았다는 얘기를... 나도 길소뜸KBS에서 보았다. 86년 작품인데 저 영화로 해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며 잊었던 감독도 다시 생각 나고...
--다시 영화배우 일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당연하다. 그러나 시절이 바뀌었고 세월은 흘렀다. 이젠 내 이름 앞에 원로자가 붙는다. 가끔 신문이나 인터넷에서원로배우 한지일이란 제목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나이엔, 그 나이에 맞는 일이 있다고 본다. 모델협회 일을 보게 된다는데, 그런 뜻 아니겠는가?

그렇다. 내가 배우되기 전에, 당초에 모델이었고, 이제 모델업계를 위해, 작은 일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악수를 하고 돌아서서 무교동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노년(老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꼿꼿하게 곧은 허리,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델 특유의 리드미컬한 캣츠 워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주 다이내믹하고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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