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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詩史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한국여성詩史<7> 논개

남자도못하는 일을, 스스로 나서서 행한 여성들이 이 나라에는 얼마든지 있다. 유능한 여성들은 지금도 있다.

홍찬선 | 기사입력 2020/09/0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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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이 쓰는 한국여성詩史<7> 논개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의기(義妓) 논개, 열아홉에 왜장을 장작으로 태웠다 

 

▲     © 운영자


열아홉 꽃다운 청춘이 나라 위해

온몸을 장작처럼 활활 태웠다*

죽음으로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목숨 빼앗기고 삶의 터전 잃은 부모형제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한 몸, 온 맘으로 던졌다   

 

가슴은 차갑고 머리만 뜨거워

옳고 그른 것보다 내 편 네 편만 따지며 

주희 떠받드는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있던

골수 패거리 성리학자들은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알아도 모른 체 했다

 

귀 뚫리고 눈 바르며 마음 밝은 

그 사람들이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의로운 이야기가 역사로 살아났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승전에 도취된 

왜장(倭將)을 남강 아름다운 바위에서

백성 도륙한 분노를 거짓 사랑으로 이끌어

열 손가락 마디마디로 처단한 가슴 벅찬 이야기

 

▲     © 운영자

 

열일곱 해 뒤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실었고

진주 사람들이 그 바위에 義巖이라 새겼다

이백 년 뒤 최진한이 의암사적비 건립했고

스무 해 흐르고 남덕하가 義妓祠 세웠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던

그대는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애국심으로***

보여주었다, 햇귀보다 더 밝은 시시비비로 

암 덩어리 안고 단죄한 그 손발 떨린 한방으로 

배달겨레 가슴에 영원한 꽃으로 피었다

코로나 태풍 외적 몰려올 때 어찌 하는지

온몸으로, 한맘으로 똑똑히 보여 주었다 

 

▲     © 운영자


* 논개(論介)는 1574년 9월3일(음) 밤8시에 태어나 사주팔자가 갑술(甲戌)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라고 전해지고 있다. 명리학 전문가인 청전 박명우 선생은 논개 사주를 “스스로 장작이 되어 추운 겨울에 고생하는 다른 사람들을 따듯하게 하는 봉사(奉仕)하는 사람”이라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왜장을 안고 순국한 논개의 삶을 잘 보여준다”고 풀었다.

 

** 1846년에 장수 현감을 지낸 정주석(鄭冑錫)은 논개가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서 태어나 자랐다며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다. 이를 근거로 장수군에서는 논개가 장수군 출신이라며 기념행사를 한다.  

 

*** 변영로의 시 <論介(논개)> 가운데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에서 인용. 

 

**** 논개(論介, ?~ 1593):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기(義妓)로 알려진 기생.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고(1593년 6월29일) 열린 왜군전승기념 연회에서 진주목 관기로서 왜장을 유인해 껴안고 남강에 빠져 순국했다.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1620년 서강의 와우산과 도봉산의 북폭포동 등에서 은거할 때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으로 논개에 대한 얘기가 실렸다. 진주 사람들도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이라고 새겨 넣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냉랭했다. 임진왜란 중에 이름이 난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됐다.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빠진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논개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는 20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경사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1721년(경종1)에 <의암사적비>를 건립하고, 기녀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했다. 1739년(영조16)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졌다. 1868년(고종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 동안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를 마련했다. 의암별제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방해로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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