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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詩史

꽃만 피우고 열매 못 맺은 천재 무용가 최승희<한국여성詩史>

뛰어난 미모에 천부적인 무희였던 최승희의 비극은 일제의 침략과 남북분단이 빚어낸 유산 가운데 하나...

홍찬선 | 기사입력 2020/11/2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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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이 쓰는 한국여성詩史<29>

꽃만 피우고 열매 못 맺은 천재 무용가 최승희 

 시대 이념 자신의 올가미에 걸리다

 

▲    장구춤을 추고 있는 최승희  © 운영자

 

하늘에서 부여받은 끼를 

시대와 이념에 착취당하고 

가난에 찌든 삶에서 제멋대로

자라난 사치벽에 스스로 무너졌다

 

시대 때문이었다고

시대 때문에 사치를 했고

시대 때문에 친일활동에 참여했다고

남편과 이념 때문이었다고

남편 때문에 북으로 넘어갔고

이념 때문에 무용이 삶처럼 망가졌다고

 

하소연할 수도

하소연할 곳도

하소연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할 말 많은 사연은 그저 

가슴 속에 묻고 삭히다 갈 뿐이었다

 

▲   1962년 찍었다고 알려진  최승희 © 운영자

 

살면서 문득문득 마주치는 

벽과 시련이 견디기 힘들었고

보릿고개 넘었다 싶으면 더 아픈 

상처가 뺑덕어미처럼 이어졌다

 

시골에서 태어나 

숙명여자보통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인생이 그렇게 꼬일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갑자기 나빠지자

구두쇠가 되어 심하게 사치하는

이중성격으로 고독을 씹어야 했다

 

교사가 되어 가계에 도움이 되려고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보아 

860명 가운데 7등 성적을 올렸지만

100명 정원 앞자리를 차지했지만

합격이 취소됐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같이 않은 이유가 첫 번째 시련이었다

 

▲   최승희의 일대기를 그린 최승희 전기의 표지     © 운영자

 

300엔에 팔려 기생되러 간다는

헛소문을 들으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무용을 배웠고

타고난 끼와 해내야 한다는 악착이 

궁합을 이뤄 이름을 얻게 되자

병든 스승을 냉정하게 배신한 뒤

조선으로 돌아와 야심만만하게

최승희무용연구소를 만들었다

 

운명의 여신은 그렇게 친절하지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임신과 출산 뒤 급성늑막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두 번째 시련을 품어준 스승에 기대

터전을 닦고 다시 홀로서기에 나섰다

훌륭한 춤꾼이 있다면 지방과 기생도 

가리지 않고 찾아가 전통춤을 배웠다

전통과 현대를 융합한 신무용으로 

미국 유럽 남미에서 순회공연하며

헤밍웨이 채플린 피카소 콕토 같은

거장들과 관객으로 사귀었다

로버트 테일러는 최승희의 

헐리우드 영화출연도 알선해주었다

 

▲     © 운영자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세 번째 시련이었다

헐리우드 영화진출이 백지화되고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해 국방헌금까지 내

해방 후 친일파로 욕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손가락질 피하려고 남편 따라 월북했다

 

시대를 스승으로 삼았던 그는

시대의 희생이 되었던 그녀는

일제강점과 좌우대립과 동족상잔의

삼각파도에 휩쓸렸던 천재는 

이념의 허구성을 보지 못했다

 

남편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친일을 탓하는 남쪽을 피해 남편 따라

북으로 가 권력투쟁의 제물이 되어

화려하게 피었던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빈 쭉정이로 시들어 버리는 운명에 빠져버렸다

 

▲    미모에 인기인이었던 최승희는 광고에도 출연하고... © 운영자

 

모든 게 다 내 탓이었다

가난을 벗어나려 구두쇠 사치꾼이 된 것도

일제강점의 멍에를 친일로 더 옭아맨 것도

친일이란 딱지를 벗으러 이념에 기댄 것도

산목숨을 위해 사람사냥에 참여했던 것도

가난도 시대도 남편도 이념의 탓도 아닌

 

모두 다 내 탓이었다

나의 잘못된 처신으로 

하늘이 어렵게 준 재주를

꽃만 화려하게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아픔을

개인과 사회와 나라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짊어져야 했다

 

강남스타일과 기생충과

방탄소년단이 누리고 있는 

한류열풍을 70년 전에 거의 만들다

식민과 이념과 사치라는 삼각파도에

열매 맺지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  여성독자들의 절찬 속에 <한국여성詩史>를 집필하고 있는 필자 홍찬선...자신이 직접 제작한 도예작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 운영자

 

* 최승희(1911. 11. 24~1967. 8.8): 강원도 홍천에서 최준현과 박용자의 딸로 태어났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인 영화제작자 최승일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지도를 받고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받았다. 

 

1929년에 귀국해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1931년 문학가 안막(安漠)과 결혼했다. 1933년 3월, 다시 이시이 문하로 들어가 터전을 잡은 뒤 독립했다. 1936년 <반도의 무희>란 영화에 출연했고, 이해 말부터 4년 동안 유럽 미국 등 세계무대로 진출했다. 로버트 테일러의 알선으로 헐리우드 영화에 진출하는 것이 논의되다가 태평양전쟁으로 백지화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체제가 형성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 해방 직전에도 중국에서 일본군 위문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5월에 귀국했다. 친일 행적이 문제되자 그해 7월20일, 남편 안막, 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1952년 공훈배우, 1955년 인민배후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1958년에 남편 안막이 반당종파분자로 체포된 뒤 취승희무용연구소도 폐쇄됐다. 1967년 숙청되어 가택연금됐다가 1967년8월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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