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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詩史

며느리 아내 어머니 1인3역 하다 47살에 죽은 염경애<한국여성詩史>

인고의 끝에는 평화와 영광이 있다지만, 개척기 한국 여성에게는 평화도 영광도...그래서 더욱 가슴 맺히는...

홍찬선 | 기사입력 2020/12/2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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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이 쓰는 한국여성詩史<39>

며느리 아내 어머니 1인3역 하다 47살에 죽은 염경애

 아름답고 조심스럽게 정숙했던 사랑

 

▲  남편으로부터 존경받던 고려의 여인...  출처 한국양성평등교육원   © 운영자

 

고생이 끝나 웃으며 살만 하니

저승사자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알콩달콩 몇 년 더 사는 것보다

아쉬움을 안고 떠나는 게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역설은 

단단한 돌로 만든 묘지석에 새겨졌다  

 

하루라도 끼니와 옷 걱정을 

하지 않으며 잠들지 못했던 여생(女生)

 

밤을 낮 삼아 

길쌈을 하고 품앗이 다니면서도

4남2녀 교육을 옹골차게 한 모생(母生)

 

집안이 한미한데다 천성까지 강직해

늘 한직으로만 맴도는 남편을 대신해

홀시어머니를 공경한 부생(婦生)과 식생(媳生) 

 

▲   염경애의 家係譜   © 운영자

 

개성의 잘 나가는 귀족 집에서 태어나

스물다섯의 늦은 나이에 수원의 홀어미 모신

최루백과 결혼한 것은 인생(人生)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된 일,

며느리 아내 어머니의 1인3역을 

슬기롭게 해야 하는 벅찬 짐이었다

 

뼈 빠지게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에

남편을 붙들고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고

그대는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게 뜻대로 돼도

제가 재주 없었다 여기고 가난을 막던 일을 

잊지 말아 달라며 하소연도 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궁전의 섬돌에 서서 임금과 더불어

당신이 옳고 그름을 논하게 된다면

저는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더라도 달게 받을 것이라며

청렴과 강직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   염경애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는 고려사..  © 운영자

 

아들 셋을 훌륭한 유학자로 키우고 

막내아들은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딸도 잘 키워 시집보냈고

막내딸은 아직 어렸을 때

남편이 정6품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 됐을 때

몹쓸 병에 걸려 마흔일곱에 먼 길 떠났다

 

결혼하고 스물세 해 동안 동고동락했던

최루백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뒷바라지 해 준

부인의 헌신에 가슴이 먹먹했다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내의 여생 모생 부생 식생과 인생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는 것

 

그치지 않는 눈물을 훔치고 

붓을 들어 묘지명을 썼다

 

▲   학식이 깊었던 남편이, 아내 염경애를 그리며 손수 쓴 염경애의 묘지명  © 운영자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

다시금 오열이 찾아들었다

고생만 하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당신의 한(恨)이 나의 한이 되는구려

 

저절로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는다

그대가 내게 준 믿음으로 맹세하노니 

당신을 다시 만날 때까지 잊지 않으리라

무덤에 함께 묻히는 못하는 일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아들과 딸들이 있어 나는 기러기 떼와 같은 

부귀가 세세로 창성할 것이리라*

 

아름답고 조심스럽게 정숙했던 경애는

문자를 알고 대의(大義)에 밝았던 경애는

말씨와 일솜씨와 행동씨가 남보다 뛰어났던 경애는

최루백의 아내인 염씨가 아니라 어엿한

염경애로 거듭 나 영생을 살고 있다

 

▲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최루백의 효성을 기리는 비각ㅣ출처: doopedia.co.kr   © 운영자

 

* 최루백이 남긴 염경애의 묘지석에서. 성율자, 김승일 옮김, 『여인들의 한국사』 (서울: 페이퍼로드, 2010), 154~155쪽.

** 염경애(廉瓊愛, 1100~1146): 고려 때 대부소경(大府少卿, 종4품)을 지낸 염덕방(廉德方)과 의령군 대부인 심씨의 딸. 스물다섯 살 때 최루백(崔婁伯, ?~1205)과 결혼해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염경애는 홀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지극히 모셨다. 다섯 명이 간신히 먹을 정도의 고려시대 하급관리 녹봉으로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늘 노심초사했다. 그런 스트레스로 마흔일곱 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불교식으로, 순천원에 안치됐다가 화장해 청량사라는 절에 안치했다가 3년 뒤에 인효원 동북쪽에서 장례를 치러 아버지 묘 옆에 안장했다고 최루백이 쓴 묘지명에 기록돼 있다.  

표지석에는 염경애의 어머니는 심지의(沈志義), 동생은 정애(貞愛)였으며, 두 딸의 이름은 귀강(貴姜)과 순강(順姜)이었다. 이름이 이렇게 기록됐다는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이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어머니’에 매몰돼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주진오 외,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 (서울: 푸른역사, 2013, 2020), 97쪽).

 

▲   기자생활 30여년...<한국여성詩史>의  필자 홍찬선이 오랫동안 재직했던 머니투데이  행사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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