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元시대

36년전 이효재는 말했다 “여성단체가 출세 발판 돼선 안 돼”

이정운기자 | 기사입력 2021/02/28 [04:5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36년전 이효재는 말했다 “여성단체가 출세 발판 돼선 안 돼”

[아무튼, 주말] ‘분단시대의 사회학’ 복간, 이효재 추모 학술대회

 

[yeowonnews.com=이정운기자] “여성단체는 권력지향적인 지도자의 개인 출세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없다. 명실공히 회원에 의한, 회원을 위한, 회원의 단체들이 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 여성단체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은 것 같지만, 아니다. 이 문장은 36년 전 발간된 고(故)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책 ‘분단시대의 사회학’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국 여성운동과 여성학의 대모(代母)인 이효재는 당시 이런 문제의식에 입각해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설립해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0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격 제기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창립도 주도했다. 2005년 호주제 폐지의 구심점이었다.

 

▲ 한국 여성운동과 여성학의 대모(代母)인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1992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을 당시 모습. / 사진=연합뉴스=여원뉴스특약     © 운영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분단시대의 사회학’은 서구에서 그대로 수입해오는 사회학이 아닌, 분단이라는 한국의 지리적·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자는 이 교수의 오랜 고민이 담긴 연구서다. 1985년 세상에 처음 나온 이 책이 이달 초 후배 학자들의 손을 거쳐 복간됐다. 지난 18일에는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에서 이효재 교수 추모 및 재출간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명예교수는 책 서두에 “선생님이 분단시대의 사회학에서 보여준 탁월한 분석은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우리 이론”이라고 썼다.

 

▲ 지난 4일 재출간된 이효재의 저서 '분단시대의 사회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운영자

 

◇분단이 타자에 대한 혐오의 근간

발제자로 나선 조영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책을 읽으면서 ’1985년에 한 얘기를 왜 우리 사회는 지금도 하고 있을까'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선생님의 통찰력이 큰 자원이 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효재 교수는 남북 분단이 역사적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나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 개개인의 심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조 연구위원은 “한국 사회의 비민주성, 폭력의 문제가 분단에서 초래한다고 했을 때 분단이 더는 군사적이거나 영토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특히 최근 불거지는 혐오와 갈등을 대개 신자유주의로 설명하는데, 사실은 분단이 만들어내는 적과 아(我)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근간을 이루고, 이것이 혐오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이재경 교수는 “이효재 선생님은 사회 각 분야의 치열한 경쟁이나 과거 산업화 과정에서의 노사 및 계급 갈등 등의 사회문제를 분단이 가져온 사회심리적 요인으로 설명한다”며 “이런 분석은 경쟁·대립·갈등이 만연하고 토론·협상·조정이 부재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유효하다”고 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 우리는 어느새인가 분단이라는 말을 안 쓰고 통일, 협력이란 말만 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분단 상황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서 분단이 던지는 문제의식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 이효재(왼쪽에서 두번째) 교수와 제자들. 1980년대 이효재 교수가 해직을 당하자 이대 사회학과 제자들은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이 교수의 연구실을 마련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근대와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 운영자

 

◇윤미향은 왜 이효재를 언급하지 않았나

학술대회에서는 오늘의 여성운동 전반에서 이효재 교수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사회학자이자 ‘파리를 생각한다’ 등의 책을 쓴 정수복 작가는 “최근의 일부 젊은 여성은 급진화되고 남성과 분리된 여성 운동을 한다”고 지적하며 “이효재 선생님은 남녀가 같이하는 여성 운동, 여성의 권리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 비전을 그리는 종합적인 여성운동을 얘기하셨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이효재 선생님은 진보 지식인이었지만 선생님의 큰 우산 아래에서는 극좌파부터 온건 보수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한자리에 모였다”며 “이들 모두가 ‘우리는 선생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포용력을 갖고 있으셨고, 모든 사람을 품으면서 함께 가셨다”고 했다.

 

김석향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왜 윤미향씨는 이효재 선생님 얘기는 안 할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대 사회학과 조교 등을 하며 이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김 교수는 “아무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때, 사회적 담론이 되도록 토대를 만드신 분이 이효재다. 그런데 수요집회가 왜 윤미향씨의 업적처럼 돼 버렸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운동이 권력으로 변질돼 지탄받는 요즘, 이효재 교수가 책 마지막 장에 쓴 글은 큰 울림을 준다. “우리의 정치가 앞으로 민주정치로 발전하며 우리 사회에 민주제도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는 여성단체와 같은 모든 민간단체, 즉 시민단체 및 이익집단들이 지배권력에 의존하며 아부하는 어용단체의 고질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이정운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yeowonnews.com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성단체#여성운동#변질#어용단체#페미니즘#여원뉴스 관련기사목록